



죽음을 넘어 다시 만나자, 그때는 꼭 사랑한다고 말할게.
Myung
gyung seo
신비를 버린 여우신
OWNER. 수수
맞아요,
나 원영 씨 좋아해요.
Yeom
won yeong
신의 사랑을 잊은 인간
OWNER. 용달
정말로 그 사람이
내가 맞아요?
명경서 & 염원영

0.남자는 멈춰서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허물어져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슴을 붙잡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때 더없는 신비를 품고 있었던 당신은 이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생을 반복해가며 혼에 더께처럼 얹혀가던 업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그저 쌓여만 갔던 세월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을 남자는 모른다. 다만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정경이 있다. 남자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산 높은 곳에 있는 초가로 달려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린 듯 나와있던 누군가의 품에 뛰어들어 안긴다. 크게 숨을 들이키면 가슴이 탁 트이는 맑고 청량한 향기가 난다. 태어나 단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지만 낯익은 향기다. 품안에 고이는 앓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면 상은 다시 눈앞의 상대에게 맺힌다. 영문모를 기시감을 느끼는 순간 상대의 양손이 남자의 뺨을 쥐었다.
"원영아."
상대는 단 한번도 남자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그러나 남자는 어쩐지 그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1.내가 처음으로 당신과 마주쳤던 날을 기억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따분한 오후였다. 유독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셈하다 문득 묘한 기색이 느껴져 눈을 들었다. 얼핏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 끝에서 흔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문 안으로 낯선 무언가가 들어섰다. 순간 바로 사람이라고 인지하지 못한 것은 상대가 이 공간과 지독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키가 지나치게 컸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문틀이 그에게는 조금 낮아보일 정도였다. 그는 머리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는데, 그때문에 얼굴을 덮고 있던 희고 반투명한 천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은 수려한 콧대와 턱선 아래로 길게 이어져 발치까지 늘어져 그를 마치 키가 큰 유령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오색으로 번뜩이는 무복을 입고 양 손을 온통 옥이며 보석으로 치장한 유령은 세상 천지를 뒤져도 그 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다. 미백색 종이 위에 왈칵 엎어진 먹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완전히 실내로 몸을 밀어넣은 그에게 이목이 쏠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자리를 지키다, 잠시 뒤 헐레벌떡 달려온 내 상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그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 같았다. 시선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겠거니 생각했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움이 의아함으로 바뀔 때쯤 그가 상사의 손을 놓고 발끝을 내쪽으로 향했다. 잘그랑.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옥이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으므로 그 소리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내 귀에 닿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내 앞에 멈춰선 그는 신이 인간을 굽어보듯 그 큰 키를 숙이고 손을 펼쳐 내 눈앞을 가볍게 쓸었다.
"업이 깊구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당신이 싫어졌다.
2.그렇다고 당신이 특별히 싫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딱, 업이니 굿이니 하는 것으로 사람을 홀리고 등쳐먹는 무속인을 싫어하는 만큼만 명경서를 싫어했다. 그들은 모르는 것도 아는 사람처럼 말했으며 아는 것은 부풀려 더 대단한 것인양 꾸며냈다. 그런 치들에게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갈취당하며 집안 뿌리를 뽑아먹고 나면 누구든 절로 치가 떨리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굳이 당사자에게 숨기지 않았다. 듣기로는 명망도 재산도 깨나 있으신 분들께 궤짝으로 돈을 받아 선심쓰듯 한 마디 두 마디 읊어주는 양반 같았는데, 그런 콧대높은 치가 굳이 싫다는 사람과 엮일 리도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므로. 기껏해봐야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몇 달 감봉이나 당할 수야 있겠지 싶었다. 속이야 좀 쓰리겠다만 그 정도는 마음의 평화에 비하면 싸게 느껴졌다.
3.하지만 나는 아직 당신을 잘 몰랐던 것이다.
4.내가 당신을 담당하게 됐단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바로 상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상사는 저 역시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을 뿐이다.
"제게 관심이 있어보이시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요. 게다가 저는 그분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는 티를 냈잖습니까. 저를 고르실 이유가…."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이 자네를 원했어."
"……."
"이상한 일이야. 원래도 친분이 좀 있었던가?"
원래 산 사람이라면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는 분이신데 왜 하필 자네였을까. 답할 말이 없었다. 상사의 말로는, 당신이 나를 원했으니 거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아마 높은 분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라는 상사의 푸념에 눈을 조금 내렸다. 젊고 아름다운 무당의 흰 소리에 홀려 말린 대추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제게 달려올 늙은이들을 생각하니 두통이 몰려왔다. 아, 또 이건가. 내 인생은 언제나 그들에게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학습된 무력감으로 뒷목이 뻐근하게 저려 낮게 한숨을 쉬었다.
수확없이 바깥으로 나오니 이번에는 후배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들을 보니 또 뭔가 심기가 단단히 틀어진 것 같았다. 후배에게 살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그들에게 혹독했던 적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들은 늘 저를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사실 자신과 얽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므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한때 그게 괴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일에 일일이 상처받고 한숨쉴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시간은 사람을 무디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얼토당토 않은 오해였다. 수습하기 위해 설명하려고 했지만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또한 자주 있는 일이었다. 누구도 남자의 진짜 모습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순순히 얻어맞을 모래자루가 필요한 것 뿐이라면 그렇게 굴어주면 그만이었다. 진짜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그쪽이 편했다. 평소같으면 그 정도로 끝났을텐데 이쪽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무리 중 덩치가 좀 있는 남자 하나가 떠밀려는 듯 손을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는 순간, 그와 자신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옥으로 된 반지와 팔찌로 장식된 희고 깨끗한 손이었다. 이곳에서 그런 손을 가진 이는 하나뿐이었으므로 누구냐고 묻는 일 없이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하관이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 사람에게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최악이었다.
5.그 뒤로는 어쩔 수 없이 원래 하던 일을 정리하고 당신의 뒤를 따라다녔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이전처럼 사람들이 공연한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당신 역시 썩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기실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는 듯 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그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세상 천지에 널렸는데 어째서 굳이 싫다는 나를 옆에 끼고 다닐 필요가 있는 것인가 싶어진 것이다. 제가 싫다는 인간을 괴롭히려는 의도라면 이해가 가지만, 명경서라는 인간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속세의 해법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이유같지는 않았다. 답이 적혀있을리가 없는 하얀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곧 시선을 느낀 당신이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마 뻔히 알고 있을텐데도 당신은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럴 때면 반투명한 천 사이로 보이는 옅은 자색 눈동자가 웃음기를 머금고 달처럼 휘영청 기울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었지만, 돌아올 답이 없으리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기에 나 역시 더 깊게 묻지 않았다.
6.한 술 더 떠 그를 만난 뒤로 거의 매일 꿈을 꾸게 되었다.
늘상 피곤에 지쳐 곯아 떨어질 때까지 몸을 움직이곤 했으므로 꿈을 꾸는 일은 드물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일상적으로 해갈되지 않은 답답함이 무의식에 반영된 걸지도 모르지. 그를 증명하듯 항상 대체로 같은 꿈을 꾸는 듯 했으나, 깨고 나면 기억이 씻은 듯 깨끗이 사라져 늘 추측에 그쳤다.
그래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힘주어 눌러 쓴 글씨 뒤에 남은 자국처럼. 종이에 얼룩진 흑연처럼. 파편적인 이미지가 찌꺼기처럼 남아 시야 밖에 흐릿한 상으로 맺혔다. 다 쉬어빠진 목소리를 쥐어짜 피를 토하듯 올려 붙이는 비명. 매캐한 연기와 쇠냄새. 온몸을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는 감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깊은 산속에서 숨을 들이킨 듯 맑고 시원하게 트여오던 숨통.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벌어지던 입가를 쓸던 익숙하고 다정한 손길. 핏물이 굳은 뺨 위로 흘러내리던, 내 것이 아닌 뜨거운 눈물. 그리고.
7.그리고.
8.이해할 수 없는 꿈을 꾸고 나면 유독 신경이 곤두섰다. 거의 매일 꾸었으니 사실상 늘 그랬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날이면 당신이 유독 거슬리게 굴었다. 어쩌면 기분탓일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이렇게 모호한 기분으로 지내는 것이 피곤해질 무렵 당신 역시 종종 나를 어둡고 날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드디어 내게 질린 걸지도 모르지. 우리는 여전히 서로가 달갑지 않았으나 여전히 함께 했다.
9.그렇게 하릴없이 시간이 흘렀다. 불편하던 기분도 평균점을 찾아 슬슬 안정을 찾아, 당신과 함께 하는 요령을 익히던 참이었다.
10.뺨에 닿는 시선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 무렵의 일이다.
11.당신에게서 답을 얻기란 대체로 요원한 일이었으나, 이것은 드물게도 당신이 답을 하든 하지 않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였다. 이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래서 물어보았지.
"그냥 보고싶어서요."
"그쪽한테는 보기 싫은 얼굴 아닙니까?"
"그랬었죠."
반쯤 농으로 물은 말이었으나 돌려받은 답은 의외로 솔직했다. 그렇겠지. 다른 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니 신경쓰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고, 시선은 계속됐다. 때문에 나는 너무나 신경이 쓰여서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혹시 자신이 죽기라도 하는지 묻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마치 물정모르는 아이가 입에 올린 무구한 질문이 귀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태도여서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으나,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누군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면서 더 웃어도 좋다고 말했더니 당신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췄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신은 갑자기 일이 생각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허둥지둥 떠났다.
'허둥지둥 떠나는 명경서'라니. 세속적인 명경서처럼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12.그 뒤로도 이따금 당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신은 바쁜 와중에도 틈이 나는 대로 내 곁에 와 앉거나 서있었고, 자주 내 옆얼굴을 바라봤다. 때로는 내가 아닌 더 먼곳에 있는 누군가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등 뒤를 돌아보면 늘 아무도 없었다. 농조로 귀신이라도 있었냐고 물으면 또다시 웃었다. 이상하게도 더는 이전처럼 속모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13."저 좋아하세요?"
그러니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당신을 기껍지 않은 만큼 당신 역시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던가. 왜 언제부턴가 내 옆에서 걷고 싶어하고, 왜 나를 그렇게 색이 분명한 시선을 보고, 무슨 말을 담고 있기에 입밖으로 내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 다물어버리는지 알고 싶었다. 다만 물으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 입으로 신을 모신다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당신 역시 모든 말을 분명하게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이어지는 답변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왜요?"
"그런 것 같아서요."
그래서 받아치는 답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평소의 당신이었다면 질세라 이쪽의 속을 긁기 위해 얄미운 답을 골라 내놓았을텐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침묵이 길었다.
"그것뿐인가요?"
"질문은 제가 먼저했잖아요."
침묵 위로 웃음소리가 흘렀다. 정말로 이 상황이 우스워서 웃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가식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최초의 이변 이후로, 당신은 점점 인간다워져갔다. 본래 사람이었고 한번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이에게 갖다 대기도 우스운 말이긴 했지만.
"저 싫어하잖아요, 원영 씨. 나도 알아요. 그럼 제 답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
"하지만 제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나는 잠시 당신을 바라보다 그것뿐이라고 대답했다.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어야 할 오류가 있었기에, 나는 무릎을 손끝으로 두어 번 두드리다 말을 덧붙였다.
"나 명경서 씨 안 싫어해요."
그러나 당신은 그 말을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명경서라는 인간에 대한 평가와 내가 가진 무속인이라는 족속에 대한 경멸과 혐오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할까하다, 당신이 그 뒤로 덧붙이는 말들이 영 사람을 억울하게 해서 말해주지 않겠노라고 일축했다. 당신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또다시 웃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고르는 듯 해서 나 역시 더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반투명한 천이 어디선가 흘러든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다, 당신이 고개를 들자 완전히 흘러내렸다. 성별을 가려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낯이었다. 당신은 그것을 주워 다시 얼굴을 가리는 대신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맞아요, 나 원영 씨 좋아해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문득 떠오른 것은 당신을 만난 뒤로 꾸기 시작했던 알 수 없는 꿈이다. 무슨 내용인지, 누가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좋으니 들어달라는 듯 끊임없이 이어지던 꿈들. 진공 속에서 외치는 말처럼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무게만큼은 진동을 타고 맨 살갗에 닿았다. 진심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상대가 자신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밀도 높은 마음을 받은 적이 있다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는데. 내 인생에 당신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잊고 살았을리가 없는데.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맞는 걸까.
14."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15."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돼요."
16."…당신이 아니면 안돼요."
그래서 당신이 내게 아무 감정도 없다 못해,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냐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어도 내게 필요한 건 당신 뿐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 뿐이에요. 당신이 맞아요. 당신이 좋아요. 천천히, 그러나 쉴틈없이 밀려드는 구애의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내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여서, 나는 드물게도 생경한 기분에 잠겨 얼굴을 쓸었내렸다. 뒷목과 귓바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부딪혀오는 마음을 받고도 동요가 없을 수 있겠는가.
17."잠깐만요. 헷갈린 건 아니냐고 물은 건 당신이 내게 아무 것도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무 생경한 이야기들이라 그런 거예요."
"……."
"그런 소리를 들어놓고 어떻게 아무 감정도 들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18."조금 두근거렸어요?"
19. "…조금은요?"
20.당신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그러나 뺨은 붉어지기는 커녕 아까보다 조금 더 창백해보이고,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진땀이 맺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괜찮은지 물었더니 당신이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매만졌다. 푸른 옥의 색이 번진 탓인지 평소보다 더 하얗게 보이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봐도 방금 마음을 고백한 사람의 모습같지 않아 한번 더 같은 질문을 건네자, 당신은 괜찮다, 하지만 속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들러야겠다,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급하게 반죽해 속사포처럼 되돌려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그 말이 진심일 거라고 믿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길 정도로 당신에게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직전에 제게 그런 마음을 전한 상대라면 더더욱 그랬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의 뒤를 따라갔다. 당신은 늘 성별이 모호한 구석이 있어서 혹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으면 어쩌나 실없는 고민을 했는데, 다행히도 기척은 남자 화장실 쪽에서 느껴졌다. 그렇게 문을 열자 낯익은 상대가 세면대를 붙잡은 채 반쯤 쓰러져 있어서, 나는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바보같은 생각은 전부 잊어버리고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21."명경서 씨! 잠깐…,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묻는 말에 당신은 내 옷자락을 세게 그러쥔다. 열이 나는 어린애처럼 뜨거운 머리통을 내 어깨에 기댄 당신의 입에서 작고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내용에 나는 아연해졌다. 최근의 당신은 늘 내가 예상치 못한 말들만 꺼내놓곤 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의 심계를 짚고 미래를 예언하던 때보다 더 놀라운 말들이었다.
"…속이 뒤틀릴 정도로 긴장했어요."
"무슨…"
"경멸당하고 뿌리쳐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
"당신이…."
그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는 허물어져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슴을 붙잡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때 더없는 신비를 품고 있었던 당신은 이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생을 반복해가며 혼에 더께처럼 얹혀가던 업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그저 쌓여만 갔던 세월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을 남자는 모른다. 다만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정경이 있다. 남자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산 높은 곳에 있는 초가로 달려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린 듯 나와있던 누군가의 품에 뛰어들어 안긴다. 크게 숨을 들이키면 가슴이 탁 트이는 맑고 청량한 향기가 난다. 태어나 단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지만 낯익은 향기다. 품안에 고이는 앓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면 상은 다시 눈앞의 상대에게 맺힌다. 영문모를 기시감을 느끼는 순간 상대의 양손이 남자의 뺨을 쥐었다.
"원영아."
상대는 단 한번도 남자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그러나 남자는 어쩐지 그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게…."
"명경서, …."
"…네가 떠올릴 때까지."
입술이 포개진다. 당혹스럽지 않았던 것도, 밀어낼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남자는 상대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망설임은 짧았다. 그가 벌어진 입술 틈으로 숨을 내주면, 상대는 마치 갈취하듯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마셨다. 입맞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절박한 행위가 길게 이어졌다. 남자의 뺨을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상대의 손이 이윽고 뒷목으로 미끄러져 결국 등 전체를 끌어안았을 때, 남자 역시 망설이다 결국 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남자 역시 얼마나 자신을 내주어할지 몰라 그가 원하는만큼 가져가게 두었다. 처음에는 그랬었고, 나중에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됐다.
뒷일같은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여명
(1) 명경서
(2) 염원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