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생에는
내가 말하게 해주렴.
깊은 산 속의 여우신
Myung
gyungseo
OWNER. 수수
연모합니다, 경서님.
신의 사랑을 받은 인간
Yeom
wonyeong
OWNER. 용달
1.여우는 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다스리던 아름다운 신록과 폐부를 가득 채우는 풀내음을 벗어나 그토록 꺼리던 인간의 땅을 숨가쁘게 가로질렀다. 네 발에 매캐한 연기와 쇳내가 배어 한 발을 뗄 때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각(一刻)이면 십 리를 가고 한식경(食頃)이면 백 리를 내달릴 수 있다는 신령의 다리가 이토록 느리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기억하는 네 향기가 피냄새에 묻혀 점점 옅어지는데 닿아야 할 곳은 점점 멀어지기만 해서, 그저 그것이 안타까워 자꾸 숨이 가빠왔다.
아이고, 아이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찌 한 마디 못 남기고 떠나셨나. 멀리서 친구와 연인과 가족을 떠나보낸 인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장례를 치를 시간도 없이 죽은 이의 몸뚱이 위로 꾸역꾸역 시체가 턱, 턱 쌓이는 진동이 소름 끼쳐 발끝이 땅에 닿으려다 흠칫 곱아들었다. 언젠가의 자신이라면 저 죽음들이 모두 공평한 크기로 안타까웠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그저 저곳에 제가 기억하는 무게가 있을까 그것만이 두려웠다. 각별히 아끼는 하나가 생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두려움을 알게 되는 것.
2.네가 처음으로 내 안에서 길을 잃었던 날을 기억한다.
토지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신령에게 산자락이란 제 소매 안이나 다름이 없으며, 짐승과 심마니들이 밟아 낸 길목과 맑은 시내는 혈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은 개미가 살갗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듯 조그마한 인간 아이가 어쩔 줄 모르고 제 안을 헤매는 모습을 보고 있었지. 작고 어린 것이 울지도 않고 꾹 참으며 애써 걷는 모양이, 힘들고 곤할 와중에도 산을 해치지 않고 조심조심 오르던 발길이 어찌나 기특하던지. 산 사람이 신령한 산속으로 돌아와 공기를 더럽히는 것을 참을 줄 모르는 짐승들마저 공연히 심술을 내질 않고 주변을 맴돌 정도였더랬지.
그러니 내가 어찌 어여삐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저무는 해와 드리운 어둠 속에서 네가 오갈 곳이 없다 여길까 싶어 등을 환히 매달고,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따라 올라오는 네 발간 두 뺨을 봤을 때 나는 생각했단다. 이런 사랑스러운 생물을 귀히 여기지 않는 법을 나는 모른다고.
3.그렇다고 네가 특별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았고 수많은 인간들이 나를 스쳐 갔으며, 그들 모두가 사랑스럽고 애틋했으므로. 인간들은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을 잠시 겪었던 신비로운 경험으로 소중히 담아두고 제 삶을 살러 떠나갔다. 아쉽기는 해도 슬프지는 않았다. 만남을 귀히 여기고 오래 기억하며 행복하게 살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너를 집안으로 들여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노곤해진 몸을 따뜻한 물로 닦아 창포향이 밴 홑옷을 입혀 옆에 뉘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너 역시 이 밤을 신기하고 귀하게 여겨주겠지. 어렸을 적 깊은 산속에서 만난 기인에 대해 벗들과 이야기하며 그가 과연 산 사람이었을지 귀신이었을지 밤새껏 떠들지도 모른다. 신이한 것들은 그렇게 사람의 기억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이다.
4.하지만 나는 아직 너를 잘 몰랐던 것이지.
5.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돌아간 뒤로도 몇 번이고 다시 산을 찾았다. 나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언제나 너를 반겼고, 함께 하는 날들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네게 정을 주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네 발소리와 다른 사람들의 발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나뭇잎이 바람에 흩어지는 소리와 새소리, 시내가 흐르는 소리 틈으로 네 숨소리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지. 그 모든 일들이 점차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 즈음부터 내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네가 산을 오르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너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더 늦기 전에 그만두고 너를 사람들 틈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어 보이는 얼굴을 보면 그런 마음은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천년에 가깝게 해온 수행마저도, 햇살 아래 내린 잎그림자를 인 네 미소 앞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6.“연모합니다.”
정신이 번쩍 든 것은 어느새 네가 아이에서 소년이,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몸에서는 고소한 우유와 햇볕에 말린 따뜻한 짚내음이 나고, 깃털처럼 가벼워 두 팔로 가득 안아 올리면 품이 남던 어린아이는 어디 가고 장성한 사내의 몸을 한 네가 거기 있었다. 단번에 농담으로 넘겨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저 또한 속절없이 네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령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네 옆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건 일종의 오만이었다.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무지마저 사랑하고 아낀다고 여기는, 긴 삶을 살아가는 장생종 특유의 이기적인 애정. 받는 상대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는 순수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그러나 틀림없이 유일하고 특별한 사랑.
그래서 여우는 그 사랑을 거절했다. 네게서 무엇도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7.얼마 뒤 청년이 혼인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뱃속이 일견 울렁이는 듯 했으나 다 잘되었다고 여겼다. 괴롭고 아쉬운 것은 저 하나면 되리라. 청년은 결국 참하고 사랑스러운 여인과 다복한 시간을 보내며 많은 아이를 갖고 곧 저와의 시간을 잊을 것이다.
8.시간이 흘렀다.
9.청년이 갑자기 산을 찾지 않기 시작했다.
10.처음에는 그저 혼인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정신이 없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갑자기 아이가 생겼을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갑자기 환경이 바뀐 것이니, 팔자 좋게 산에나 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늘 청년이 올라오던 자리에 앉아 지난 추억을 곱씹으면 마음을 다독이면 곧 가라앉았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지 않나. 그저 이대로 청년이 제 짝과 잘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다 대대손손 그를 닮은 자손들을 지켜줄 수 있으면 그것이 신령된 제게는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
11.그러나 그가 발걸음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마을까지 날아갔다 온 작은 새들이 불길한 말들을 물어와 여우에게 들려주었다. 사람들의 마을에서 연기가 일고 무시무시한 쇳소리가 들려오며, 저들끼리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더 듣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수십, 어쩌면 수백 년 만의 일이었다.
톡 쏘는 연기 냄새에 코를 막기도 전에 주저앉아 우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청년을 많이 닮은 여자였다.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는 동안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귓전을 어지럽혔다. 염가의 둘째를 데려갔다고 하네. 역모에 휘말렸다고 하던데. 그 강직한 성품에 그랬을 리가 있는가, 그저 요령이 없어 제 한 몸 지킬 줄 모르고 곧은 소리를 하다 끌려간 것이겠지. 안타깝게 되었어, 참 괜찮은 청년이었는데. 명문이라던 염가도 이제 대가 끊기겠군. 어허, 이 사람. 그게 문제인가, 역모죄는 삼족을 멸한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야….
12.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13.그저 달렸다.
14.자신이 다스리던 아름다운 신록과 폐부를 가득 채우는 풀내음을 벗어나 그토록 꺼리던 인간의 땅을 숨가쁘게 가로질렀다. 달리는 내내 네 생각을 했다. 네가 나에게 마음을 전했던 그 밤의 온도 위로 덧발리던 네 조용한 목소리, 차마 손조차 대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던 네 사랑스러운 모습을 모두 꺼내어 되새겼다.
모든 것은 너를 위한 일이라 여겼으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그 짧은 생을 진정으로 아꼈다면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 짧은 생을 태워 반짝이는 모든 순간을 내게 준다면 그저 기쁘게 받았어야 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러나 나는 어떻게 했나? 네 마음을 거절하고 너에게 상처를 주고, 네게 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 그래서 무엇이 남았나.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후회만이 남아, 너를 향해 달려가는 네 숨을 불태웠다.
15.삼일 밤낮을 달렸다.
16.어쩌면 나흘, 어쩌면 닷새. 어쩌면 엿새, 이레, 여드레였을지도 모른다.
17.그저 네게 닿을 때까지 하염없이 달렸다.
18.마침내 바람에 흩어진 네 향기를 붙잡아 너를 따라잡았으나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네 숨을 끊던 인간들의 목덜미를 물어 던져버리고 얼른 네 손을 붙잡아 앞에 앉았으나 본능적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혼과 백이 너를 떠나고 있었다. 네 무릎에 머리를 괸 너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시퍼렇게 멍든 목줄기는 밧줄에 죄여 소리를 내기가 힘이 든 것 같았다. 너는 곧 포기하고 손을 들어 내 뺨 위에 얹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영아, 나는….”
이름을 부르자 네 얼굴이 살풋 밝아지는 듯 했다. 원영아, 나는.
“나도 너를,”
너를 사랑한다.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다. 네가 처음 내 안을 헤매었던 그 순간부터 우리가 산에 입힌 사계를 함께 하고 네가 나와 함께 한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길어지게 되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산을 떠나 늘 네게 머물러 있었다. 네가 정녕 나를 떠나야 한다면 이 한마디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너 홀로 외롭게 하는 사랑이 아니었다고.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숨을 고르는 순간 네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다급히 뒷말을 이었으나 전해졌는지 알 재간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딱 한 걸음이 느렸다. 사람의 생은 신령을 기다려주기에는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너를 품에 안고 길게 울었다. 창포향 대신 비린 쇠와 텁텁한 흙내음이 밴 지저분한 옷 위로 얼굴을 묻자 네 가슴팍과 배가 척척하게 젖어 들어 내 뺨과 옷자락을 더럽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다음 생에는 이리 미련하게 굴지 않으마.”
“…….”
“그러니 한 번만 더 나와 만나주겠니….”
“…….”
“딱 한 번만 더 만나서, 그때는.”
그때는 내가 먼저 네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다오.
18.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대역죄인들이 목숨을 잃은 벌판에는 여우를 닮은 바위가 생겼다. 혹자는 그것이 그 죄인 중 하나를 사랑한 신령이 몇날 몇 달을 울다 바위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말했으나, 혹여 나랏님에게 들켜 경을 칠까 큰 소리로 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몹시 재미있게 여겨 늘 그들의 발치를 맴돌며 그 말이 사실인지 물었다.
19.그럼 그들은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다 허리를 숙이고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이었다.
20.“그래, 그 여우와 청년은 사실 약속을 하나 했단다….”

여명
(1) 명경서
(2) 염원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