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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반드시 생환할 것, 그리고 미래를 약속해줄 것

…너는 여전히 내 운명이야?

세계가 아니라 네 입으로 말해줘.

Luden

Kalstein

실을 따라간 아리아드네

OWNER. 온

Saul

Noid

실에 묶인 테세우스

OWNER. 벤나

세계가 더이상 이끌어주지 않아도

그렇다 말할게.

​그 맹약은 이번 삶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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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L E D G E  I T  T O  F A T E

루덴 칼스테인 · 유 영  &  사울 노이드 · 운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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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폭설


사울 노이드는 이번에도 말을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대신 먼발치에서 루덴 칼스테인을 지켜만 봤다. 이번 생에는 여전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사울은 지난 생에 그랬듯이 루덴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비온 뒤 하늘 같은 무지개색. 안색은 저번보다 창백하고 병색 짙었지만 그래도 루덴은 여전히 루덴이었다. 유영이 유영이었던 것처럼, 아직 그 자리에 존재했다. 사울은 아주 멀리에서 루덴을 지켜봐 왔다. 그 앞에 나서거나 다가가지는 않고 그 주변을 오랫동안 맴돌았다. 이대로 충분할 리는 없지만 괜찮을 수는 있겠다는 기분을 그는 느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사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 기억해낸 것은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의 일이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유영에 대해 떠올렸다.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이전 생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영원을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이, 평생을 곁에 살고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 직후의 사울은 잠시 이 기억이 꿈인지 아닌지를 가늠해 봤다. 그리고 여느 전생을 떠올린 사람들이 울며 지나간 인연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주저앉기보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길로 사울은 루덴을 찾으러 갔다. 신이 이끌고 운명이 안배한 것처럼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이, 별과 노래가, 빛과 어둠이, 모든 파도와 새잎이 그에게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눈을 감고 걸어도 상대에게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한 환상 같은 기분을, 그때의 사울은 느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 어딘가를 찾아가, 그 근처 집의 창문이 들여다보이는 자리에 서는 순간 사울은 상대가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창가에 루덴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처럼, 보호자 없는 침대에 홀로 앉아 외로이 창밖을 보며.

한때 운율은 동료들과 약속한 적이 있었다. 전사하거든 그 동료들이 전사자의 남은 가족을 함께 보살피기로. 또한 유영에게도 약속한 게 있었다. 꼭 돌아오라는 유영의 당부에, 그러기로 노력해 보겠노라고. 진실로 운율은 귀환하기 위해 노력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지 못하고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았고, 유영이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 채 눈을 감았다. 함께하자는 약속도 청혼도 무엇 하나 이룬 적 없는 삶이었다.
그래서 이번 생의 사울 노이드는, 루덴이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깨닫게 됐다. 신이 계신다면 그 벌을 주는 것이 틀림없도록 루덴은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을 봤다. 이전 생의 유영이 운율을 발견하고 늘 시선으로 그를 쫓았던 것과는 다르게 사울에게 눈길 같은 건 주지 않았다. 이전에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것으로 관심을 모두 소진한 것처럼, 애정에 한도가 있다면 저번 생에 모두 써 버렸다는 듯이. 루덴의 눈은 사울을 알아보는 것도, 운율을 기억하는 것도 아닌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전생 같은 것은 말끔히 잊고 세탁된 것처럼 다시 태어난 인간의 눈을 했다. 사울은 전생을 기억해냈을 때보다도 그 순간 조금 더 무너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행복했을까.
그 이후에는 잘 살았을까.

묻고 싶지만 입에 올릴 수 없어 절실한 질문도 있다는 것을 사울은 그때 처음 알았다. 먼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자 얇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주 멀리 있는데도 그 여자애한테선 오렌지밭 한가운데 서서 맡는 것처럼 진한 오렌지꽃 향기가 났다.


 


말하지 않았지만, 사울은 루덴을 아주 오랫동안 보아 왔다. 루덴은 눈치채지 못하는 거리에서 그는 언제나 루덴을 지켜보고 있었다. 삶이 무한하지 않으므로 지금 이 순간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번 생에야말로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다짐을 사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저번 생의 삶과 죽음을 똑똑히 기억했다. 거의 대부분을 잊지 않을 만큼 짧고 선명한 삶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의 루덴은 남들보다 조금 더 짧은 삶을 살 것만 같았다. 사울은 자주 루덴의 집 근처에서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마다 루덴은 언제나 창가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거나 창가에 찾아오는 새에게 빵 부스러기를 나누어 주며 말을 거는 게 고작이었다. 안색은 희었고 눈비가 오는 날이면 앓아눕는지 창문이 열리는 법이 없었다. 루덴은 여전히 사람이라기보다 무언가의 가장자리 같았다. 이곳에 존재하지만 금방 닳아 끝나버리는 것. 오래된 테이프의 마지막 부분이자 닳아버린 책장의 모서리 같은 사람. 사울은 그 앞에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내가 당신의 전 연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이곳으로 자신을 이끌었던 모든 신탁과 운명이 그러한 것처럼, 루덴의 앞에 나타나서 저번에 이런 삶을 살았노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떤 첫만남은 많은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사울 노이드는 이제 알고 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루덴의 곁에서 보냈다. 그러는 동안 루덴은 아주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자랐다. 그것보다는 사울이 자라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루덴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울은 언제나 그 주변에 있었다. 낯선 어른에게 끌려갈 뻔했을 때 같은 큰 사건부터,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건을 잃어버리고 곤란해할 때, 아플 때, 힘들 때, 슬플 때……. 알 수 없는 모든 익명의 이름으로 사울은 언제나 루덴 곁에 함께했다. 어떤 날은 친절한 이웃을 가장하고, 어떤 날은 익명의 소포를 보내기도 하면서. 루덴은 그것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운명이 자신을 돕고 있다는 것만큼은 어렴풋이 느꼈다. 어렵고 힘든 순간마다 기막힌 행운이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루덴은 알았다. 그건 단순히 운이 좋다는 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가까웠다. 제 앞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도 말을 걸지도 않지만 도와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루덴은 알았다. 아주 긴 꿈을 꾸는 것처럼 루덴은 오랫동안 사울의 존재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수색이 무색하게 사울은 루덴의 앞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는 법 없이 어른이 됐다. 사울이 자라는 동안 루덴도 같이 자랐다. 속도는 다르겠지만 꾸준히 차근차근.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살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면서. 함께 자란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사울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됐다. 먼발치에서 루덴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울은 전생의 유영도 이랬으리라고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어제의 새벽이 지나가고 이 넓은 우주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수한 행운이 함께하는 일인지. 이 길고 오랜 세상과 시간 동안 겹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기막힌 우연의 겹침인지. 아주 긴 시간 동안 사울은 루덴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은 바라게 됐다. 다시 한 번 네 곁에서, 같은 시간을, 같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그러나 그러지 못해도 좋아. 이대로라도 네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위해 존재하고, 네가 있어서 내가 이곳에 있어. 이전에 유영이 말했었다. 사울은 사울 노이드가 된 지금도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품 안에 안긴 유영이 어느 정도의 키와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목소리로 말했는지까지 사울은 아직도 모두 기억했다. 고작 그 짧은 기억이 사울 노이드를 줄곧 루덴의 곁에 머물게 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루덴은 누군가 줄곧 위성처럼 제 곁을 맴돈다는 것을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기막힌 우연과 행운이 제 삶에는 함께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운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자연스럽게 루덴은 누군가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척 주변을 살펴본 끝에야 루덴은 정말로 ‘누군가’가 언제나 저를 돕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말을 걸거나 다가오거나, 심지어는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접촉조차 하지 않아서 그 존재를 확신하는 일은 대단히 수고로웠다. 루덴은 오래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는 제 삶에 위험한 순간이 닥친다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루덴은 확신했다. 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당장 의료 조치가 필요했을 때라거나, 집에 문제가 생겨 갑작스럽게 이사할 집을 구해야 했을 때 같은 큰 사건들이 있는 순간에도 그는 언제나 곁에 있었다. 오히려 루덴 칼스테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루덴의 문제를 해결하고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떠났다. 루덴은 그것이 단순히 연민이나 동정, 후원이나 봉사의 개념이 아닌 것을 알았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배가 비슷한 것 같았고, 아마도 청년일 거였다. 소년에서 사내가 되어가는 어떤 남자. 저와 비슷한 나이인 것 같으면서도, 만날 수는 없는 사람.
그래서 루덴은 자신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를 찾기로 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둠 속의 에로스 같은 남자와 벌써 몇 년을 함께해 왔다.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남자를 보고 싶어서 등불을 들기로 했다. 어떤 각오를 다진 사람처럼 루덴은 시계탑에 올랐다. 먼 어둠이 깔리고 하나둘 별이 내린 밤 아래, 불이 켜진 마을은 아름다웠다. 루덴은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것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와아, 하고 작게 탄성을 냈다. 아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멀리서 본 마을은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삶과 죽음, 아픔과 평범함이 모두 한 덩어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루덴은 시계탑 가장자리에 섰다. 그리고 바람을 등지고 뒤로 걸었다. 세 발자국쯤 걷자 네 발자국째에 뒤로 딛은 발이 허공에 뜨는 것을 느꼈다. 중심을 잃는 순간 루덴은 눈을 감았다. 평온한 추락일 것이다. 그걸 오래 고대해온 사람처럼 그는 잠시 미소지었다.

누군가 허리와 손을 채잡는 느낌에 눈을 뜨자 사울이 그곳에 있었다.
하강의 바람이나 중력의 속도보다 더 선명한 녹색 눈을 하고서.



당신은 누구야?
…….
사울은 방금 왜 그런 일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몸이 먼저 움직인 것처럼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신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네가 무슨 일을 해왔고 어떤 사람인지 밝혀도 좋다고 허락한 것처럼. 사울은 지금 또한 아주 오래전 루덴을 처음 봤을 때같이 운명이나 신이 안배한 순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루덴이 있었다. 사울은 이 순간이 오기까지 자기가 몇 번을 환생했는지 모두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몇 번의 환생을 거듭하는 동안 매번 유영의, 루덴의 뒤를 쫓았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나게 된 전 연인은 새로웠다.

 


항상 곁에 있었잖아.
…….
대답도 하지 않을 거야?
루덴은 어쩐지 눈앞의 남자에게 알 수 없는 기시감과 애틋함을 느꼈다. 놓아줘야 할 것 같다가도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것 같은 모순을 느꼈다. 사울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뒤로 걸어 시계탑 안쪽으로 루덴을 데리고 들어와서야 놓아주었다. 잦아든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몇 번 흐트러트리고 지나갔다. 한참 오래 전 들었던 운명의 속삭임을, 지금 이 순간 다시 듣는 듯한 착각을 사울은 느꼈다. 이 품에 다시 안기고, 좋은 말을 소곤거리고, 성에 찰 때까지 품에 안고 잠드는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아주 오랜 속죄를 끝낸 것처럼 신이 어떤 허락과 자비를 베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걸 눈치채지도 못했으면서 루덴이 손을 뻗어 사울의 뺨을 감쌌다.
사실 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당신의 뭐였어?
…….
이런 거 어디서 보면 연인이거나 가족이던걸.
음.
둘 다야?
운율은 청혼한 적이 없으니 사울 노이드는 이 대답에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루덴은 아주 확실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이 있던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위화감과 익숙함이 동시에 들었다.

 


약속한 게 있는 것 같아.
그래?
뭔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해.
루덴은 말을 이어가며 사울의 손을 잡고 제 심장 위에 얹어주었다. 처음 만난 사이는 아닌 것처럼, 사울은 잠시 움찔했으나 물러나지 않은 채 한참 루덴을 내려다봤다. 더운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루덴은 시선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알고 싶어, 당신이 누구인지. 왜 줄곧 내 옆에 있었는지. 그리고 오래 침묵하다가 루덴은 고개를 들었다. 너머로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는 다시 말했다.
이상하지. 기다렸어, 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사랑한다고도.
…….
이유 알지 못한 채 루덴은 눈내리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사울이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루덴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런 날이면 누군가를 오래 걱정했거든. 그게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춥게 지내지는 않을까, 감기는 걸리지 않을까,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고 지낼까, 아프고 다친 데는 없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루덴의 눈동자는 비온 다음 하늘처럼 연한 무지개색이었다. 발아래 마을은 고요했고 사울은 새삼스럽게 사랑이 하는 일에 대해 다시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야 할 곳에 비로소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지만, 죽음을 기억한 사람은 유한하다는 것에 갇혀 맴도는 많은 것을 이해할 권리를 얻었다. 망설이다 사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벽만큼 묵묵한 목소리였다.
약속한 게 있었거든.
그리고?
이행은 못 했지, 아마…….
또?
그 벌을 받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서…….
그 한 마디로 루덴은 사울이 아주 오랫동안 저를 찾아 헤맸고, 주변을 오래 맴돌았다는 것을 모두 이해했다. 등 뒤로 긴 밤이 지나고 있었다. 사위가 어둑해 눈이 시렸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 곁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곁에 머물 수도 나설 수도 없다는 게 내가 해야 하는 속죄였을지도 몰라. 돌아오겠다는 말도 지키지 못했고, 내가 없는 세계에서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 수 없어서……. 사울은 천천히 대답했고 그 말에 어떤 억울함이나 서러움은 없었다. 루덴은 사울이 그 말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오래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슬픔은 묵은 때처럼 씻겨나가 없어지고 그 자리를 공허와 외로움이 채웠을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모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직은 밤이 덜 추운지 눈이 천천히 쌓였다. 바닥에 떨어진 눈송이가 천천히 녹는 것을 보다가, 루덴이 물었다. 그래서 여전히 사랑해?
답을 듣지 않아도 루덴은 사울이 뭐라고 말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울도 한 호흡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여전히 사랑해, 같은 게 아니야. 그것이 언제든, 언제까지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지……
다시 여름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 세계가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나 가끔 있는 예외의 바깥처럼 아주 느리게.

律泳

​​

(1)  루덴 칼스테인

​​

(2)  사울 노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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