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이 있어주세요.
Jang
Yeong Hwa
우자
OWNER. 네그
다시는 내게서 도망가지 마….
Jeong
범부
OWNER. 곰팡
…함께 있을게요.
정 · 제천 & 장영화 · 나생

01. 夢
그럴 때면 무언가 이 손으로 무엇이라도 움켜쥐고 산으로 들로 달려 나가고 싶은 욕구가 치민다.
몽중의 이유 없는 충동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깬 뒤에도 목구멍 안쪽의 까끌거리는 잔여물처럼 남아있는 것이 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보고 싶다. 높은 산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싶다.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처음 듣는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다. 오랜만이라는 인삿말보다 처음 뵙는다는 날 선 경계를 당연하게 여기고 싶다. 그것이 총체적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을 나는 이 꿈을 오래도록 꾼 뒤에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새벽녘의 공기는 찼다. 꿈을 꾸고 일어난 뒤에는 현실이 더욱 시리게 다가왔다. 장지문을 열고 마루에 앉아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응시하노라면 내 손에 쥔 것과 쥐지 못한 것의 경계가 저 하늘처럼 불분명하게 흐려졌다. 망막에 남은 침전물을 털어버리려 눈을 깜빡인다. 시선이 마당 건너 익숙한 문간에 가서 멈춘다. 저 문 너머에 영영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 하나가 잠들어 있다.
"이만 가십시다. 지체하면 들킬 거요." 한 달 전, 나와 겨우 말문을 튼 사내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부끄럼을 모르고 그의 손을 덥썩 잡아 몸을 일으킨다. 잡힌 손목이 낙인처럼 뜨거웠다. 오늘 나는 십 년을 모시던 규방의 아씨를 배신하고, 겨우 한 달을 알고 지낸 사내와 도망을 간다.
대감집 노비 둘이서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종을 부리는 집에서는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야기다. 주인이 얼마나 잘해주고 못해주었는지는 사실상 도망의 이유에 삼 할도 되지 않는다. 이 행위는 그저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사는 이들이 일생에 한 번쯤 꿈 꿔보는 연정 소설의 일부처럼 여겨진다. 나 역시 나의 이 도망이 그렇게 비춰지길 바란다. 때로 누이처럼, 친구처럼 지내던 대감집 아씨보다 투박한 손으로 장작을 패는 사내가 더 기꺼워 치맛자락 가볍게 도망을 쳐버린 몸종으로 보이기를.
뒷문을 나서면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해가 마저 뜨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꿈 속의 한 장면처럼, 그날은 숨이 턱 끝까지 차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올 때까지 뛰었으나 나는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이 도망 끝에 무언가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냥 도망이라는 행위 자체가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찰나에 스쳐야 할 현상을 지속하는 일에는 많은 노력이 든다. 어쩌면 지속하려 발버둥칠 때는 이미 끝났는지도 모른다. 안일한 도망 끝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때는 몰랐다.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한 붉은 눈의 아씨.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그 곁이 나의 자리라는 확신이 들면서도,
어쩌면 나는 나를 옭아매는 '어떤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02. 死
두 손으로 숨통을 조이는 감각이 선명하다. 활을 겨누고 서면 놀랄 만큼 차분해졌다. 숨소리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억센 활을 당기고 시위를 고정하는 손끝. 먼 미래에 내가 이 일을 아주 오래 후회할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도중에 멈추기는 어려웠다. 의무가 어깨를 짓누르고 턱을 들게 한다. 한 번도 쉽게 숙인 적 없는 고개는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늘상 빳빳하다. 나뭇결이 비틀리며 짧게 앓는다. 곧 팽팽해진 시위가 제자리를 찾는다. 곧게 쏘아지는 화살. 바닥으로 붉게 퍼지는 선혈.
머리를 빗겨달란 부탁과 함께, 내게 흰 목덜미를 그대로 내보이며 경대 앞에 다소곳이 앉은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종종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아득해졌다.
그러므로 도망쳐야 했다.
03. 婚
두 명의 여인, 두 명의 신랑, 두 번의 결혼.
당신과 나는 '이번에도'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함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당신과 가족이 되고 싶었던 '최초의 나'는 당신 덕에 거짓말이 늘고 만 퇴마사였고, 어느 시절의 '나'는 당신과 한 집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퇴마사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날의 '나'는 활 한 자루만 손에 쥔 채 쓸쓸히 죽어간 외로운 사내였으며, 지금의 '나'는 당신의 머리를 빗기거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허락되었습니다.
우리는 두 여인으로 만나 각자의 혼인을 하고 각자의 정인과 백년해로를 약조하였으니 나는 막연하게나마 슬퍼했습니다. 무엇이 슬픈 줄도 모르고 그저, 각자의 비녀로 머리를 올린 채 안채에 마주 앉은 것이, 상황이, 시대가, 우리의 처지가 가여워서, 슬퍼서, 애달파서.
도망을 꾀하여도 결국 당신 곁으로 맴돌아 돌아오고야 마는 나의 박복한 운명이 문득 기구해서.
사내의 손을 잡고 도망을 친 날, 그날 자행했던 짧은 입맞춤을 당신이 그토록 오래 기억할 줄은 몰랐습니다. 비겁한 말처럼 들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망을 꾀하는 자가 어찌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나는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을 나의 존재처럼 당신 입술에 남을 나의 온기도 금세 잊히기를, 한밤의 괴이한 일로만 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맞출 곳 없는 몸을 맞추고 맞물려선 안 될 곳이 맞물리며 섧게 울었던 날, 옥가락지 낀 하얀 손이 나붓하게 내 뺨을 쓸고 서로의 존재로 방 안을 환히 밝히던 날, 서로의 살갗을 매만지며 피부 위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는 것이 허락된 그 밤에, 사실은,
사실은 두려웠다고,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나의 오랜 충동과 당신을 죽이는 악몽이, 그럼에도 당신 곁을 나의 자리라고 인식하는 모순적인 마음이 저주스러워 도망을 치고 싶었다고, 당신이 무섭도록 기꺼워서 차라리 멀리 하고 싶었다고,
그럼에도 지금은, 같이 있고 싶다고 토로하던 그 순간에, 아아.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04. 結
아스라이 노을이 진다. 하늘 끝이 붉다. 동쪽 하늘의 가장 먼 곳부터 새까만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곧 완전히 해가 질 것이다. 산과 들보다는 규방이 어울리는 차림새의 두 여인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둑 위에 앉아 있었다. 성미 급한 별들이 벌써부터 머리 위로 은빛 자태를 드러낸다.
대화란 없었다. 오래도록 그랬다.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농사 짓는 이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며 부르는 노랫소리, 둑 아래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규칙 없는 바람이 들판을 내달리는 소리만이 공백을 채운다. 새삼스레 침묵이 불편하다 투정하는 이는 없었다. 고요는 익숙했고 어쩌면 서로의 존재가 이미 소란했다.
하늘이 절반 쯤 어둑하게 변해 갈 즈음, 붉은 저고리의 여인이 입을 연다.
"후회하진 않니."
물 안에 조약돌 하나 던져 넣은 것처럼 침묵에 파문이 인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귓가를 스친다. 붉고 파란 눈동자가 서로를 담는다. 쪽빛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여인의 귀밑머리를 정돈하고 떨어진다.
"과거엔, 그랬을지도요."
"…어떤 것을 가장 후회했는데?"
"많습니다. 아주 많아요."
쪽빛 저고리의 여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숲에서 나온 뒤, 당신을 바로 죽이지 못한 것. 최초에 당신에게 정을 줘버린 것. 국경을 넘지 못한 것. 끝까지 이 약속을 저버리지 못한 것. 미련이 남아, 결국 당신 근처를 맴도는 일까지, 전부."
눈 감으면 떠오르는 심상이 있다. 이제는 두 사람이 모두 공유하는 어떤 장면들. 문장은 간결했으나 행간 사이에 읽히는 슬픔과 고통, 평온과 염원, 어느 날 말로써 나누었던 약속에 대한 것들은 낡았으나 빛 바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긴긴 삶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럼, 다음 생에는 우리… 만나지 말까."
단조로운 물음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른다. 낮게 터지는 웃음소리. 마치 터무니없는 말을 들었다는듯, 혹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묻는다는 것처럼.
"아뇨."
"어째서."
옥가락지를 낀 여인의 손 위로 끝이 거친 손이 가 닿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심스레 마주잡는다. 때로 언어로 정제할 필요가 없는 감정들이 있다. 그것은 구태여 말로써 표현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손을 잡는 행위로도, 혹은 감은 눈 아래로 입술이 맞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진다. 모르지 않았으므로 상체가 조금 기운다. 조금 더 가깝게, 서로를 느낄 수 있는 거리까지.
숨결이 섞이기 직전, 누구도 듣지 못할 작은 속삭임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행복하니까요."

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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